5월 11일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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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5월 11일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by 현♡율마미 2022.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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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국무회의를 통해 5월 11일은 국가기념일이 되었습니다.

바로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인데요.

부정부패에 반대하고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정의

1894년 3월 봉건체제의 개혁을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수호하고자 2차로 봉기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을 말합니다.

 

역사적 의의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봉건사회의 부정ㆍ부패 척결 및 반외세의 가치를 내걸었던 대규모 민중항쟁으로, 1894년 1월 고부 농민봉기를 도화선으로 3월 전라도 무장에서 전면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피지배 계층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진행된 민중항쟁으로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의지를 계승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대중에 의한 혁명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침략 야욕과, 부패한 조선왕조 봉건 지배층의 외세 의존 체제 수호의 벽에 좌절하였으나, 1894년 이후 전개된 의병항쟁, 3ㆍ1 운동과 항일 무장 투쟁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기친 사회개혁 운동과 자주적 국권 수호운동으로서 한국의 근대화와 민족 민중운동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지만, 19세기 후반 우리나라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변화시키고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을미의병 활도, 3ㆍ1 운동, 4ㆍ19 혁명,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모태로서 오늘날 평등사상과 자유민주화 지평을 연 근대 민속사의 대사건이었습니다. 

 

발생배경

앙정치의 문란은 탐관오리의 득세를 가져왔고, 그로 인해 사회는 동요되고 삼정의 문란을 초래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지방관들의 농간으로 수탈의 수단으로 변하여 농촌사회의 파탄을 가져왔고,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산속에 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고향을 떠나 유랑민이 되어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였습니다. 이로 인한 민중의 불만이 더욱 커지면서 봉건사회의 모순을 스스로 해결하려는 주인의식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이에 봉건사회 경제체제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은 봉건 통치 계급의 무자비한 착취와 외세 자본주의 침략에 대항한 민족의 저항의식으로 발전되어 갔습니다. 이와 같이 봉건체제의 모순이 깊어가는 가운데 1862년 이래 삼남의 70여 고을에서 농민봉기가 발생하였고, 이러한 농민봉기는 189년 전국적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농민항쟁의 조직과 사상적 기반이 된 것은 동학입니다. 동학은 경주출신의 몰락 양반 최제우가 자본주의 열강이 점차 침략의 야욕을 뻗쳐오던 1860년 서학(천주교)에 대항하여 창시한 민족종교입니다. 동학사상의 핵심 내용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당시 봉건 지배계층은 백성을 오로지 수탈의 대상으로만 보았으나 동학은 평등사상을 제시하였고, 이는 봉건 지배계층의 입장에서 볼 때 유교적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불온사상으로 탄압의 대상이 되었지만 민중의 요구를 반영한 이념이었기에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인물 4인

최제우 : 1824~1864 

동학사상을 창시하고, 동학사상의 핵심인 시천주 사상과 개벽사상으로 우리 민족의 근대화에 결정적인 분수령을 형성하며, 당시의 도탄에 빠져있던 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최시형: 1827~1898

동학의 2대 교주로, 최제우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한 1861년 6월 동학을 맡기 시작하여, 한 달에 서너 차례씩 최제우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집에 돌아와 배운 것을 실천하고 명상과 도를 닦았습니다. 또한 1894년 12월 말 동학농민혁명이 일본군의 개입으로 진압되자 피신생활을 하면서 포교에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손병희: 1861~1921

천도교의 제3대 교주로, 독립운동가이자 33인의 민족 대표 중의 한 사람입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호남지역을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였습니다.

 

박인호: 1855~1940

천도교 제4대 교주로 동학농민혁명 때 호서지방 지도자였습니다. 1900년에 동학의 경도주가 되어 손병희를 도와 동학 재건에 힘썼고, 1904년에는 동학 교도들로 조직된 진보회를 통하여 갑진개화운동의 일선에 나섰으며, 1907년 천도교 차도 주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천도교 제3세 교조 손병희의 지도 아래 천도교 중흥에 힘써서 교세를 크게 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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